세계는 기후변화 문제와 에너지 정책에 관해 '치명적인 착각과 오류'를 적지 않게 겪어왔다. 무지와 독선, 근거 없는 낙관론, 이념적 편향성 등이 원인이었고, 혹독한 폭염, 홍수, 가뭄, 산불과 팬데믹을 겪으면서 지구인들은 그 대가를 단단히 치르고 있다. 한국도 '발등의 불'이 되었다. 세계 전체로는 트럼프의 '기후변화는 과학적 사기'라는 무지와 독선이 기후변화 대응 골든타임이었던 재임 4년간 시계를 멈추게 하였다. 한국에서는 '탈원전'이라는 이념적 편향이 비슷한 시기 4년간 에너지 안정 골든타임을 역시 흘려보냈다. 여기에 '설마 지구가 그렇게 빨리 뜨거워질까?' '유럽 일부에서 전쟁이 터졌다고 에너지 대란이야 있겠나?' 하는 근거 없는 낙관론이 위기를 부채질했다. 한국도 '한전의 45조 적자 참사' '오송 참변' '잼버리 망신' 등이 모두 '설마병' 속에서 손 빠른 대응을 못 한 사례들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따져본다.
기온 상승 방어 가능할 것이라는 착각
'2015 파리기후변화협약'에서 지구의 기온 상승은 1800년 초 산업화 이전 대비 최고 2.0도 상승으로 억제하고, 가급적 1.5도에서 막는 노력을 한다는 결의를 하였다. 치명적 착각의 시발이었다. 2015년 당시에 이미 산업화 이전 대비 0.8도 오른 상태였고, 그 후에 0.4도 이상 더 올랐다니 남은 것도 별로 없다. 작년 말 이집트의 기후변화당사국회의(COP27)에서 격론 끝에 1.5도 방어 결의가 유지되었지만, 그것을 진심으로 믿는 나라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1.5도 상승은 시간문제이고, 심지어 환경단체에서는 금세기에 3.0도까지 오를 것이라는 심각한 경고를 쏟고 있다. COP27에서 유엔 사무총장은 "우리는 지금 기후변화 지옥으로 향하는 고속도로에서 가속페달을 밟고 있다. 지구는 복구 불가능한 임계점에 다다르고 있고, 향후 10년 내 거주 가능한 지구를 위한 싸움이 결론날 것이다"고 절규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인 대책과 전략은 없었다. 올 11월 아랍에미리트(UAE)에서 개최될 COP28의 의장이 국영 석유공사 사장이라고 벌써 논란이 크다. 얼마 전에 인도에서 종료된 주요 20개국(G20) 에너지장관 회의에서 화석연료 감축에 관한 어떤 결정적 합의도 이뤄지지 못했다. 탄소 배출 1위와 2위인 중국과 미국에선 역대 한 번도 기후변화당사국총회가 개최된 적도 없다. 러시아나 인도, 사우디아라비아는 아예 노골적으로 화석연료 감축에 부정적이다. 그러는 사이 북미와 유럽 기온이 46도, 48도까지 올라가고, 점차 스웨덴의 소녀 툰베리가 울부짖었던 '거주 불능 지구'로의 속도는 빨라지고 있는 듯하다. 기온 상승을 완화해야 한다고 말하던 선진국들이 이제는 대놓고 기후변화에 '적응(adaptation)'해야 한다고 말을 바꾼다.
뜨거워진 기후에 의식주를 맞춰 살아야 하고, 홍수나 가뭄을 잘 다스리면서, 뜨거운 세상에 가급적 야외 활동을 하지 말고 적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도 진작 기후적응체제로 들어갔어야 했다. 내년은 더 덥다고 한다.
화석연료 시대가 끝나간다는 착각
사우디의 야마니 석유상은 "돌이 없어서 석기시대가 끝난 것이 아니다"며 "석유의 시대도 결국 끝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 이유는 신기술 신소재가 등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후 재앙의 주범이라는 석유, 석탄, 천연가스도 매장량이 바닥이 나서가 아니라 다른 청정 고효율 연료가 등장해서 그 시대가 끝날 것이라는 예측을 암시한 것이다. 기후 재앙이 급속도로 진전되고, 에너지 기술이 발전하면서 화석연료 퇴장의 필요성은 높아졌지만, 빨리 퇴출당할 것이라고 보는 관측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자원 보유국의 콧대는 더 높아졌고, 유럽에서 풍력이나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가 역설적으로 기후변화로 효율이 더 떨어지면서 석탄 발전의 수명을 연장하는 형편이 되었고, 미국도 셰일가스 개발에 들어간 투자비는 뽑아야 하겠다는 생각이다. 내년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되면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석탄 발전에서 탄소를 포집·저장하는 기술이 발전하고 천연가스로 수소를 생산하게 되면서 화석연료의 새로운 가능성이 생겼다. 2050년에 탄소 배출 넷제로(Net Zero)를 선언한 주요 국가들도 화석연료, 특히 석탄 발전을 영구 중단할 것이라는 확고한 의지를 가진 나라는 없을 것이다. 미국에너지연구소에 따르면 실제로 화석연료 사용 비중은 지난해 전체의 82%로, 전년보다 비중이나 양에서 늘어났다. 탄소 감축 결의는 난무하겠지만 구속력 있고, 제재가 동반되는 협약은 쉽지 않을 듯하다. 영국의 COP26에서 문재인 전 대통령이 표명한 선도적(?) 역할보다는 다음 회의 때는 다른 당사국들의 중론을 좇는 전략적 자세를 취하는 것이 어떨지 생각해본다.
'한국은 기후변화 악당국' 오명의 착오
한국은 기후변화 주범인 온실가스 배출의 주범으로서 상응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적지 않게 들어왔다. 실제 온실가스 배출국 순위는 인도네시아, 사우디 등과 비슷한 수준에서 9~10위권이다. 그런데 한국은 작년에 온실가스 배출량이 잠정으로 6억5000만t 정도로 집계되면서 전년 대비 3.5% 감소했다. 2010년 이후 가장 낮은 수치이며, 자발적 감축안 기준 연도인 2018년 대비로는 10% 정도 감소한 것이다. 주요 탄소배출국에서 그래도 이 정도 탄소를 잡아나가는 나라가 몇이나 있을까?
제조업 국가로 에너지 다소비 국가이지만, 에너지효율 면에서 강점이 있고 탄소 흡수원인 삼림 자원도 풍부하다. 태양광이 몰매를 맞아 주눅이 들어 있지만, 전력거래소 외의 직거래 전력까지 포함하면 재생에너지가 올여름 최고 더운 날 전체 전력 수요의 17%까지 달해 효자 역할을 하고 있다. 해외 탄소 감축도 늘어갈 것이다. 그래도 작년 탄소 감축의 주원인이 경기 부진 등에 있고, 우리 경제 위상에 걸맞게 기후 재앙을 막기 위한 탄소 감축 노력을 훨씬 더 해야 하겠지만 세계 무대에서 주눅 들지 말고 우리의 노력과 성과도 당당히 알리고, '산업과 환경의 조화'를 이루는 입장을 선도해나가야 할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한·미·일의 전략적 공조가 이 분야에서도 여지가 있을 것 같다.
한전의 애로는 공급능력 부족에 있다는 착각
올 8월 8일 오후 5시, 100GW가 넘는 전력 총수요가 발생하여 역사상 최고치에 달했지만, 예비율은 11.4%로 충분했다. 평시에는 20% 이상의 넉넉한 예비율을 갖고 있다. 이후 2011년 대규모 순환 단전을 겪은 이후 원전이나 화력발전 용량을 확충했고, 신재생에너지도 꾸준히 늘려온 덕분이다.
물론 데이터센터나 반도체단지 건설 등 전력의 신규 수요는 늘어나지만 현재 건설 중이거나 계획된 에너지 공급이 제대로 진행되면 전반적인 공급 능력에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도 이런 나라는 많지 않다.
[조환익 전 한전 사장(녹현리서치 회장)]